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요한 볼프강 폰 괴테 (문단 편집) === 문학으로의 입문 === 이런 풍족함 속에서 아버지는 그가 원하는 대로 부족함 없는 교육을 받게해줬다. 괴테는 [[라틴어]] 뿐만 아니라 [[그리스어]], [[프랑스어]], [[영어]], [[이탈리아어]]를 교육받았으며 뿐만 아니라 [[성경|성서]]와 [[히브리어]], [[이디시어]] 등도 교육받았다. 아버지가 구비해주신 수많은 장서와 언어 교육 그리고 괴테의 호기심은 그가 문인으로 성장하는 촉발제가 되었다. 괴테의 문학적 정신과 문인으로서의 사상은 [[7년 전쟁]]의 영향을 받으며 성장하기 시작했다. 괴테의 외할아버지는 구(舊)세계를 대표하는 [[합스부르크 제국|오스트리아]]에 의한 질서를 옹호했지만 아버지는 [[프로이센 왕국|프로이센]]에 의한 신흥 질서를 지지했다. 이런 대립은 어린 괴테의 정신적 성장에 큰 영향을 끼쳤다. [[7년 전쟁]] 와중에 [[프랑스군]]이 독일 북부에 진군했을 때, 괴테의 집에 프랑스군 점령군 사령관인 토랑 백작이 머문 적이 있다. 아버지는 무척 그를 싫어했지만, 10살 무렵의 괴테는 프랑스어를 배우고 싶다고 어머니와 같이 아버지를 설득했다. 아버지는 그래서 아들을 위해서 프랑스군 사령관인 백작을 극진히 대접해 친하게 지냈고 백작은 이런 대접에 고마워하며 어린 괴테에게 독일어를 잘하는 프랑스군 부하장교를 시켜 [[프랑스어]]를 가르치게 해줬다. 토랑 백작은 미술과 연극 애호가이기도 해서 프랑크푸르트 시에서는 프랑스 미술과 연극 등 프랑스의 문화를 눈으로 볼 기회가 매일 있었다. 이때의 인연으로 훗날 토랑 백작은 프랑스에 유학 온 괴테를 반갑게 맞이하여 머물 숙소를 알선해주었고 괴테가 유럽에서 이름을 떨칠 때도 서로 편지도 보내고 친근한 사이로 지내게 된다. 프랑스군이 물러간 후 프랑크푸르트에서 거행된 [[요제프 2세]]의 대관식은 귀족 사회에 대한 괴테의 시각을 확장시켰다. 괴테는 아버지의 권유로 [[라이프치히 대학교]]에서 입학하여 [[법률]]학을 배웠다. [[라이프치히]] 생활 동안 괴테는 프랑크푸르트와 다르게 보다 선진적이고 인구도 많았던 그 도시에서 [[계몽주의]]적 사상을 피부로 느낀다. 괴테는 22살 때, [[변호사]] 사무소를 열었고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대학에서도 2년 동안 머물면서 [[법학]]을 공부했는데, 이 인연으로 지금도 스트라스부르 대학교에는 '''괴테의 길'''이라는 길과 괴테의 동상이 세워져있다. 하지만 법학보단 글 쓰길 좋아하던 괴테는 24살 때, 희곡《[[괴츠 폰 베를리힝엔]]》을 쓰며 문학에 발을 내민다. 그리고 1년 후인 1774년 25살 때, 괴테는《'''[[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발표한다. 발표 직후 괴테는 유럽에 유명세를 떨치는데 심지어는 나중에 "나를 언제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작가로만 기억한다."고 불만을 가질 정도로 엄청난 인기를 구가한다. 그가 60년에 걸쳐 완성한 필생의 대작이자 세계 문학 사상 최대 걸작 중 하나인《'''[[파우스트(희곡)|파우스트]]'''》[* 거의 60년을 매달리면서 무수한 수정과 편집을 번갈아가며 썼다.]도《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인기만은 못 따라갈 정도였다. 30대 후반에 방문한 [[이탈리아]]에서도 괴테는《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쓴 작가로 유명했으며 실제로 본인이 책을 읽으며 느낀 감동을 괴테에게 열변하는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그러나 그 커다란 유명세와는 반대로 괴테는 작품 자체로는 큰 돈을 벌지 못했다. 출판 계약 당시 출판사는 별볼일 없는 신인 작가일 뿐인 괴테에게 인세를 조금 내줬고 유럽 곳곳에서는 무단으로 출판되는 사본이 마구잡이로 나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공의 계기가 된 것은 맞고 이 소설을 보고 감탄한 작센-바이마르 공국의 공작 카를 아우구스트가 그를 초청해 공무원으로 고용했다.[* 이 고용은 공국 내각의 반발을 일으켰는데, 아우구스트는 반대를 무릅쓰고 괴테를 등용했다. 당시 괴테는 27살의 정치 경력이 전무한 인기 작가였다. 그럼에도 괴테는 맡은 업무에 성실히 임했고 외교와 행정 등 주요 업무는 물론 농업 사업과 도로 정비에도 관심을 기울이지만 바이마르의 태생적인 한계와 곧 닥친 [[나폴레옹 전쟁]]의 영향으로 뜻을 완전히 이룩하지는 못한다.] 공무원으로 3년동안 지내면서 바이마르 궁정 내의 공무원 중 최고 수준으로 돈을 두둑히 받았지만, 공무 업무가 주는 스트레스와 권태 그리고 문인으로서 정체된 상황 때문에 고민에 빠졌다. 괴테는 과거부터 이탈리아에 품어 왔던 동경과 문인으로서의 침체 상태를 벗어나려는 의지가 어울려 이탈리아로의 여행을 결정했다.[* 괴테가 이탈리아 여행 도중 남긴 기록과 본국에 보낸 편지등을 보면 단순히 공무에 질려 휴가차 여행을 떠난 것이 아니라 고대로부터 이어진 위대한 예술과 그 명맥을 체험하여 예술가로서의 자신을 발전시키고 함양하기 위함이었다. 언뜻 도피처럼 보이는 이 여행은 어느 정도의 계획 하에 이루어졌던 것이다. 괴테는 고대 로마의 유산에 몰두하며 이를 배웠고 이탈리아를 여행하는 내내 회화와 조각 등의 미술을 탐구했고 광물학과 식물학에도 몰두하였다.] 괴테는 아우구스트 공작은 물론 주변 친우들에게까지 이탈리아 여행을 숨긴 채, 저작 활동을 위한 유급 휴가를 미리 신청해놓았다가 공작과 친우들과 함께 간 칼스바트[* 현재 [[체코]]의 카를로비바리] 휴가 도중 몰래 새벽녘에 여행을 떠난다. 공작은 괴테가 신청한 기일이 없는 유급 휴가와 그의 저작 완성이 수개월 내에 끝날 거라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공무 업무에 싫증을 느낀 것과 문학에 대한 집념을 이해한 공작은 이탈리아에서의 여행과 예술 활동에 전념할 수 있도록 계속해서 그를 후원했다. 이때 괴테의 나이는 30대 후반이었다. 여행이 시작하고 얼마 후에는 바이마르의 친우들과 다시 연락하기 시작했고 출판을 위한 원고도 발송하며 활발한 저작 활동을 이어나갔다. 아우구스트 공작은 괴테가 여행에서 돌아온 후에도 전처럼 친구로 여겨 늘그막까지 매우 친하게 지냈다. 괴테의 이탈리아 여행은 그에게 문학적 성장을 이루게 해준 계기가 되었고 이는 문인으로서뿐만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괴테의 인생의 커다란 전환점이 되었다. 괴테가 문학 외의 철학과 식물학, 미술 등등에 관심을 기울일 수 있었던 것도 공작의 재정적 지원이 있어 그가 생활적으로 여유를 가진 덕이다. 괴테는 이탈리아 여행을 떠나기 전에도 널리 이름을 알린 작가였는데 그쯤에는 유명세가 이탈리아에도 파다하게 퍼져 정체를 숨기고 가명까지 사용한 여행에서도 그의 방문이 소문나 여러 예술가와 위정자의 관심을 끌었다. [[독일]] 본국에 있을 때에도 그를 만나고자 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는 자신의 작품을 보여주고 싶다며 만남을 청하는 예비 작가들의 산더미 같은 편지를 받았고 실제로도 많은 문인과 만났다.《[[빌헬름 텔]]》,《[[군도(독일 희곡)|군도]]》로 유명한 극작가 [[프리드리히 실러|프리드리히 폰 실러]]도 그에게 작품을 보이면서 주목을 받아 괴테의 도움으로 극작가로 대박난 경우이다.[* 실러와 괴테가 처음부터 절친한 것은 아니었다. 두 사람은 한때 정치관과 생활에서의 성향 사이로 냉담한 사이였지만 우연히 만난 강연회에서 대화를 나눈 뒤부터 가까워져 독일 문학 사상 유래가 없는 친구 사이로 발전하게 된다. 괴테와 실러는 11년간 1000통이 넘는 편지를 주고받았다.] 이외에도 [[슐레겔]], [[노발리스]] 등이 그의 집을 찾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